너와 나의 거리

 고등학교 연극반 시절

연극을 함께 준비하는 모든 구성원의 마음을 모으는 작업 중에 <도마게임>이라고 있었다.

한 사람씩 도마위에 올려놓고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의 단점만 얘기하는 게임인데

늘 좋은 게 좋은 거고,
필요한 싸움은 친구가 대신해주던 나에게
엄청 놀라운 시도이기도 했다.

평소 넌 이런게 안 좋아 따위의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 본 적도 없는 나였기에
그 시간은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경험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이, 그래서 하는 제스쳐가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어떤 게 될 수도 있구나.
(아으씨... 되게 잘생긴 애였는데...)

내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구나.

그 때 우리 중에 백ㅅㅎ 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많이 짖꿏고 말이 가볍고 그렇지만
사과도 잘하고 부탁도 잘 들어주는 착한 친구였다.

쌍커풀 없는 눈매의 씨익 잘 웃어대던...
말을 살짝 더듬었지만 말하는 걸 좋아하고
춤도 좋아하고
사람들한테 앞에서 까불거리기도 잘하고
일진같은 애들앞에서는 넉살좋게 빵셔틀도 잘 한다던 소문도 들리는 아이.

ㅈㄱ오빠가 그 친구에게 도마게임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

"너는 울타리가 없어.
너와 친구들 사이에 울타리가 없으면
누군가 너한테 쉽게 들어올 수 있지만,
대신 너는 쉽게 상처받을 수 있어.
그러니까 적당한 높이의 울타리를 세워"

오래된 이야기라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대략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 전까지 울타리를 치우라는 얘기만 들었었다.
마음의 문을 열어라... 뭐 그런 식의,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가르침이 었다. (성서드립)

그 이후로 적절한 울타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많은 경험이 생겼다.

 

몇 일 전 지인이 나에게 부탁을 했다.

평생동안 잊혀지지 않을 강렬한 도움을 받게 되어
인연이 맺어진 분.

그 뒤로 자주 찾아뵙고 관계를 유지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 분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울타리를 매우 높게 세우셨지만 나에게는 많이 낮추셨구나.

그 분이 가족에게 소개한 단 두 명 중에
내가 들어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친하다고 생각해주셔서 고맙다.' 였는데

엊그제 부탁을 하실 때는

'이게 반복되면 어쩌지.
어떻게 섭섭하시지 않게 거절을 해야 하지.
미리 거절의 뉘앙스를 남겨야 할까.
아님 모른 척 할까.'
여러 생각들이 들었다.

내가 기대를 하게 만든 것 같다.

이 분만 아니라
나에게 자꾸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는 거 보면.

이런 부탁을 남한테 쉽게 하시는 성격도 아닌데
나한테만 이러시면...
나를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는 거고,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작용을 했겠지.

그리고 지금 몸이 아프고 힘드니
친한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부탁해도 되겠지...
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아침에 지하철에서 아래의 시를 보고
지금 나를 또 돌아보게 된다.

나의 안전거리는 꽤 먼 걸까.

아니 사실은

내가 가까워지고 싶을 땐,
상대가 나에 대한 안전거리를 줄일 수 있게 막 노력하다가

내가 아쉽지 않으면
상대가 너무 가까이 온다고
상대의 과함을 탓하고... 

내가 그렇게 부족한 사람인가부다.

 

 

 


아, 백ㅅㅎ 얘기하니 생각난...
이걸 들은 것도 한참 전인데
백ㅅㅎ이 하늘나라로 갔단 얘기를 건너건너들었다.
사실일까...
만약 갔다면... 명복을 빈다.
그리고
고맙다고 꼭 말하고 싶다.
그 때 나한테 잘해줘서...
그리고 나랑 잘 놀아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