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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나를 이루어 온 것들

日就月將 2020. 8. 5. 08:39

고등학교때
연극반을 했었다.
그 어떤 고등행위의 최상의 결과물을 얻어내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정성)과 이 세상의 선함까지 끌어모으듯
(ex. 유퀴즈에 나온 서울대의대생한테
시험을 잘 보는 비법같은 게 있냐고 물었는데,
그녀가 "시험 보기 전에는 마음을 착하게 먹어요." 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마도 시험에 대한 그녀의 절실함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일년에 연극을 한 편 올리기 위해 
매주 체력훈련을 했다.

운동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발성연습을 하고

밤에는 운동장 한 켠 등나무에 모여서 서로의 마음을 모으는 작업을 했다.
여름방학에는 
기록적인 더위로 유명했던 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땀에 쩔은 구질구질한 우리가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노는 물장난이란!


우리를 지도하던 연출이 있었다.
내 인생의 한 시기에
여러방면으로 충격을 많이 준 분.

강남 8학군의 고등학생이 대체로 그러하듯 강력한 부모님의 공부 압박에 전멸(?)한
우리 전학년의 사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이미 2년전에 졸업한
5살 차이나는 대학생 선배오빠가 투입되었다.

그의 카리스마와 다년간의 경험, 이번에 연극을 꼭 올려 연극반을 살리겠다는 열정,
그리고 치밀한 성격은 
감수성 예민하던 우리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그의 적절한 이벤트(?)로

나는 생애 처음, 행복해서 흘리는 눈물을 흘렸다.

행복해서 울 수도 있구나.

그런 게 있구나.

 

시간이 한참 지나 고속터미널 근처로 회사를 이직하고 회사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회사 앞에서 서너살 쯤 된 딸아이를 데리고 지나가는 ㅈㄱ오빠를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너무나 좋아서 "조만간 차 한잔 마셔요." 라고 호들갑 떨었는데

그리고 연락처를 따고 문자를 주고 받고는 알게 됐다.

나를 별로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구나.

맞아. 원래 오빠는 연극반안에서의 나를 챙긴 거지. 개인적으로 나랑 연락한다거나 나를 막 좋아하진 않았지.

라며 씁쓸해 했었는데

지금 22살의 오빠의 행동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왠지 피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오글거렸고, 그 때 내가 큰바위얼굴이라고 느꼈던 것 처럼 전지전능 위대하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편애했고 (고1인 내 동기 여자애랑 사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지금 생각하면 음;;;), 컴플렉스가 많았고,

그 땐 오빠가 꽤 불안했던 것 같다.

군대도 그렇고, 앞으로의 미래도 그렇고...

너무 찌질했던 시절의 자신을 어쩌면 잊어버리고 싶을지도 몰라.

 

암튼 오빠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시절 치열했던 여름의 기억으로

지금의 나를 이루는 꽤 많은 것들을 얻었다.

우직함과 성실함으로 그 더위에도, 그 힘듦에도 개근하며 나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얻었고... 

(그렇게 조직에서 신뢰를 받으며 지금은 크게 의미 없어보이는 장 자리도 경험하게 되고, 그룹의 리더라면 향후 장이 될 사람, 혹은 구성원들에 대한 1:1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체득한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경험했으며

덜덜 떨었지만 무대위에도 설 수 있었고

연극 예술에 대해 관심도 갖게 되었다.

감동의 눈물도 흘려보았고

조직에 대한 사랑과 개인에 대한 사랑은 구별되는 것도 느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아차 싶은 건...

어떤 걸 꼭 이루고 싶으면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야 하는 거구나

그걸 이루고 싶은 나 자신의 모든 것, 몸과 지성, 의지 뿐만이 아닌...

어떤 선함과 정성까지도...

그걸 지금 깨달을 수 있는건

바로 뜨거웠던 그 94년도 여름 덕분인 것 같다.

 

갑자기 ㅈㄱ오빠의 시그니쳐 노래를 듣고 싶구나.

youtu.be/UtyECGboCV8

 

 

그리고 그 시절...

자가제작한 카세트테이프로 늘어지게 듣고

영동시장의 노래방에서 많이 부르던, 그 노래도 추가

 

youtu.be/mKUg4XTkn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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